[도로 숫자 해부 ⑤] 도로 위 사람들: 분홍선을 칠한 공무원

'불법'을 각오하고 칠한 색깔 유도선, 삽 대신 수레를 만든 구청 주무관, 그리고 달리는 차 옆에서 도로를 고치는 사람들. 연재의 마지막은 숫자 뒤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생활 속 경제 이야기를 숫자로 쉽게 풀어드리는 템휴입니다.

지난 네 편 동안 도로를 숫자로 뜯어봤습니다. 11만 7천km의 길, 7년 버티는 아스팔트, 한 겨울 32만 톤의 제설제, 하루 740건씩 생기는 포트홀. 그런데 이 숫자들을 움직이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새벽에 차로를 막고 포장을 고치는 작업자, 밤새 제설차를 모는 운전원, 그리고 늘 보던 도로에서 '이렇게 하면 덜 다치지 않을까'를 고민한 공무원들입니다.

마지막 5편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고속도로에 처음 분홍선을 칠한 사람, 제설 현장의 불편을 발명으로 바꾼 구청 직원, 그리고 차가 달리는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숫자로 짚습니다. 해외에서도 도로를 바꾼 건 늘 현장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연재 순서

  1. 대한민국 도로 11만 7천km, 누가 깔고 누가 고칠까
  2. 아스팔트는 몇 년 버티나: 재포장의 경제학
  3. 겨울 도로의 경제학: 제설
  4. 포트홀: 도로 위 지뢰, 배상은 얼마나 받나
  5. 도로 위 사람들: 분홍선을 칠한 공무원 (이번 글)

분홍선을 칠한 공무원

2011년 3월, 영동고속도로 안산분기점에서 사망 사고가 났습니다. 하이패스 차로를 지난 승용차와 화물차 축중 차로를 지난 화물차가 짧은 구간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가려다 엉켰고, 화물차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한국도로공사 군포지사에 근무하던 윤석덕 차장에게 이 분기점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도 이곳에서 길을 잘못 들어 목포 방향 고속도로를 탄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아이들의 그림에서 나왔습니다. 자녀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다가 '초등학생도 알아볼 수 있게 도로에 색을 칠해 보자'는 생각이 떠오른 겁니다. 문제는 법이었습니다. 당시 도로교통법상 노면에는 흰색·노란색·주황색·빨간색·파란색만 칠할 수 있었고, 분홍색과 초록색은 불법이었습니다. 경찰에 입건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길을 열어 준 건 현장의 경찰관이었습니다. 당시 관할 고속도로순찰대의 임용훈 경찰관이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다면 못 할 게 뭐냐며 승인했고, 2011년 5월 3일 안산분기점에 처음으로 분홍선과 초록선이 칠해졌습니다. 도색 롤러로 일일이 칠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고, 항의 전화도 빗발쳤다고 합니다.

  1. 2011년5월 3일 안산분기점에 첫 색깔 유도선. 이 구간 사고는 연 25건에서 3건으로 줄었고, 남은 3건도 시야가 나쁜 장마철에 났습니다. 감소율로는 약 88%입니다(템휴 계산).
  2. 2014년판교분기점을 거쳐 다른 지사들이 앞다퉈 따라 칠하면서 76곳으로 늘었습니다.
  3. 2017년도로공사가 2011~2014년 설치한 76곳을 분석한 결과 분기점 사고 40%, 나들목 사고 22%, 평균 27%가 줄었습니다. 2016년 12월부터 1년간 실증 연구를 거쳐 정부 설치·관리 매뉴얼이 만들어졌고, 같은 해 서울시 도시고속도로 20곳 실험에서는 차로 변경이 50%, 사고 위험도가 45% 줄었습니다.
  4. 2021년4월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처음 칠한 지 10년 만에 합법이 됐습니다.
  5. 2024년5월 7일 정부혁신 유공자로 국민훈장 모란장. 정부 포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례라 선정됐다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고속도로에만 900여 곳에 설치돼 있습니다.

분홍은 오른쪽, 초록은 왼쪽

윤 차장의 설명에 따르면 분기점에서 우회전할 때는 분홍색 선을, 좌회전할 때는 초록색 선을 따라가면 됩니다. 처음 붙인 이름은 '방향 유도 컬러레인'이었는데, 국토교통부가 '노면 색깔 유도선'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최근 아프리카 섬나라 모리셔스에 파견돼 교통 혼잡 완화 사업을 맡으면서 이 제도를 그곳에도 전하려 하고 있습니다.

삽 대신 수레: 제설 현장의 발명가들

현장을 바꾼 공무원은 또 있습니다. 서울 노원구 토목과 김홍중 주무관은 2016년부터 제설을 맡으면서, 삽으로 제설제를 뿌리면 낭비가 심하고 골고루 뿌리기도 어렵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노인들이 작은 카트를 끌고 가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주말마다 직접 그린 도면을 들고 세운상가에서 부품을 사 모았습니다. 모터가 타 버리는 실패를 거쳐 약 4개월 만에 배터리와 회전판을 단 손수레형 자동 살포기를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숫자로 나왔습니다. 들쭉날쭉 뿌려지던 제설제가 1.5m 간격으로 고르게 뿌려졌고, 1km를 제설하는 비용이 60만 원에서 11만 2천 원으로 줄었습니다. 약 81% 절감입니다(템휴 계산). 특허와 조달청 등록까지 마치면서 서울 종로구가 78대, 경기 남양주시가 60대를 사 가는 등 다른 지자체와 군부대로 퍼졌습니다.

서울 강동구 도로과 박천성 주무관은 20년간 제설 전문요원으로 일하며 제설차 컨베이어가 겨울마다 고장 나는 문제를 겪었습니다. 고장 난 컨베이어를 고치다 차량 틈에 끼이는 사고를 직접 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유압으로 컨베이어 장력을 조절해 이탈을 막는 장치를 발명해 2013년 특허를 받았습니다. 현장의 불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장 좋은 해법을 낸 사례들입니다.

달리는 차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

도로를 고치는 일은 대부분 차가 달리는 길 위에서 이뤄집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고속도로에서 차로를 막고 하는 작업은 한 달 평균 7,500건, 1년이면 약 9만 건입니다(월평균 기준 템휴 계산). 포장 보수, 차선 재도색, 시설물 점검이 모두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만큼 위험합니다. 2017~2021년 5년 동안 고속도로 작업 중 사고는 170건, 사망자는 50명이었습니다. 해마다 10명꼴로 작업자가 숨진 셈입니다. 사고의 90%는 앞에 있는 작업 안내 차량과 안전시설을 제때 보지 못해 일어났고, 브레이크도 밟지 못한 채 부딪히다 보니 치사율이 31%로 일반 교통사고(9.9%)의 3배를 넘었습니다.

11월이 가장 위험합니다

도로공사가 2022~2024년 통계를 분석한 결과, 11월은 고속도로 작업장 교통사고 사망자가 7명으로 연중 가장 많았습니다. 월평균(3명)의 2배가 넘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보수 작업이 몰리면서 11월 차로 차단 작업이 월 9,100건으로 평소보다 21% 많기 때문입니다. 큰 일교차로 2차 사고 사망자도 많은 달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주황색 경광등을 단 작업 안내 차량이 보이면, 그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리 속도를 줄이고 차로를 옮겨 주세요.

해외의 '분홍선'들

미국: 우유 마차가 그린 첫 중앙선

지금은 당연한 도로 중앙선도 한 사람의 관찰에서 시작됐습니다. 미국 미시간주 웨인 카운티 도로위원이던 에드워드 하인스는 우유가 새는 마차가 길 위에 하얀 자국을 남기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길 가운데 선을 그어 마주 오는 차를 나누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1911년 트렌턴의 리버로드에 처음으로 중앙선이 칠해졌고, 1917년에는 미국 최초로 시골 주 도로에도 중앙선이 그어졌습니다. 미시간주 교통국은 이 중앙선이 자동차 교통 역사상 가장 중요한 단일 안전장치로 불려 왔다고 소개합니다. 윤 차장의 분홍선이 아이들 그림에서 나왔듯, 중앙선은 우유 자국에서 나온 셈입니다.

영국: 고양이 눈을 닮은 도로 반사체

영국 핼리팩스의 도로 공사업자 퍼시 쇼는 안개 낀 밤 위험한 내리막길을 운전하다, 울타리에 앉은 고양이의 눈이 헤드라이트에 반짝이는 것을 봤습니다.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로 도로에 박는 반사체 '캐츠아이'를 만들어 1934년 특허를 받고 이듬해 회사를 세웠습니다. 차가 밟고 지나가면 고무 쿠션이 눈꺼풀처럼 닫히면서 고인 빗물로 유리를 닦아 내는 구조라 늘 깨끗하게 빛났습니다. 이 발명은 지금도 전 세계 도로에 쓰이고, 그는 1965년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미국: 작업구간 사망자의 79%는 운전자와 동승자

작업자 안전에서는 미국 통계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2024년 미국 작업구간 교통사고 사망자는 850명으로 2023년(905명)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하루 평균 2명 넘게 숨집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673명, 약 79%는 작업자가 아니라 차에 타고 있던 운전자와 동승자였습니다(템휴 계산). 같은 시기 도로 공사 현장에서 숨진 작업자는 2023년 82명이었습니다. 작업구간에서 속도를 줄이는 일이 작업자뿐 아니라 운전자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은 1999년부터 매년 봄 '전국 작업구간 안전 주간'을 열고, 그중 하루는 모두 주황색 옷을 입는 'Go Orange Day'로 정해 운전자들의 경각심을 높입니다. 2024년 기준 작업구간 사망 사고의 절반 이상이 밤에, 3분의 1 이상이 과속과 관련해 일어났습니다.

구분한국(고속도로)미국(전체 도로)
작업 중 숨진 작업자연평균 약 10명(2017~2021년)82명(2023년, 도로 공사 현장)
작업구간 사고 위험치사율 31%, 일반 사고(9.9%)의 3배사망자 850명(2024년), 하루 2명 이상
가장 위험한 때11월(작업 물량 21% 증가)밤(사망 사고의 절반 이상)
대표 캠페인작업 안내 차량 보면 감속·차로 변경매년 4월 작업구간 안전 주간(1999년~)

두 나라는 집계 범위가 달라(한국은 고속도로 작업 중 사고, 미국은 모든 도로의 작업구간 사고) 숫자를 직접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연재를 마치며: 숫자로 본 대한민국 도로

  • 1편: 전국 도로는 116,775km, 지구 2.9바퀴입니다. 국가가 맡는 도로는 17.2%뿐이고 82.8%는 지자체 몫입니다.
  • 2편: 아스팔트는 보통 7년을 버팁니다. 서울은 재포장 주기를 6.6년에서 8년까지 늘렸고, 예방 보수 1달러가 나중의 6~10달러를 아낀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 3편: 고속도로 한 곳에만 제설제 32.4만 톤과 2,495명이 겨울을 지킵니다. 소금은 톤당 약 12만 원, 염화칼슘은 20만~30만 원입니다.
  • 4편: 포트홀은 하루 평균 약 740건 접수됩니다. 피해는 국가배상법 5조로 배상받을 수 있고, 블랙박스 원본이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 5편: 도로를 바꾼 건 결국 현장의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 한 명이 칠한 분홍선이 분기점·나들목 사고를 평균 27% 줄였습니다.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한 건 '시골 마을 길까지 모든 도로를 깔고 고치는 인간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감탄에서였습니다. 다섯 편을 쓰고 나니 그 감탄이 숫자로 바뀌었습니다. 1년에 9만 번 차로를 막고, 한 겨울 32만 톤의 제설제를 쌓고, 하루 740개의 구멍을 메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도로를 달립니다. 다음에 고속도로에서 작업 안내 차량을 만나면, 조금 일찍 속도를 줄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참고 자료

  • 쿠키뉴스, 고속도로 색깔 유도선 도입한 도로공사 직원 국민훈장 받아(2024.5.8)
  •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도로에 분홍·초록색 선 개발자(2024.7) / CBS노컷뉴스, 노면유도선 잡혀갈 각오로 칠했죠(2024.5) / 파이낸셜뉴스, 혁신하는 대한민국 사람들(2024.10)
  • 머니투데이, 사고율 88% 감소 도로에 분홍색 칠하자 벌어진 일(2024.5.14) / 아시아경제, 사고율 85% 감소 도로에 분홍색 칠한 이 남자(2023.1) / 다음 콘텐츠, 노면 색깔유도선의 시작과 색상별 의미
  • 서울신문, 삽 대신 수레로 제설 방법 확 바꾼 노원의 발명 행정(2019.2.12) / 문화일보, 노원구 염화칼슘 자동살포기 / 강동구청 보도자료, 제설담당 공무원 20년 노하우를 발명특허로(2013.5.14)
  • 경향신문, 고속도로 작업자 매년 10명 차량 충돌로 사망(2022.4.8) / 한국도로공사, 11월 고속도로 교통사고 사망자 최다(2025.11, 경기도교통정보센터 게시)
  • Michigan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보도자료(Edward N. Hines, Design for Function Award) / Wikipedia, Edward N. Hines
  • Calderdale Museums, Percy Shaw / Wikipedia, Percy Shaw·Cat's eye(road)
  • ATSSA, New statistics show decline in work zone fatalities(2026.4) / FHWA·USDOT, National Work Zone Awareness Week / NJTPA, National Work Zone Awareness Week 통계 / Missouri DOT LTAP

본 글의 수치는 2026년 10월 1일까지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템휴 계산'으로 표시한 값은 공개 수치로 직접 계산한 결과이며, 나라별 작업구간 통계는 집계 범위가 달라 직접 비교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상, 템휴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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