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생활 속 경제 이야기를 숫자로 쉽게 풀어드리는 템휴입니다.
97년 전 가을, 1929년 10월 23일 뉴욕. 공사 중이던 크라이슬러 빌딩 꼭대기에서 길이 38m짜리 첨탑이 약 90분 만에 솟아올랐습니다. 건물 안에 몰래 조립해 두었다가 한 번에 끌어올린 것이었고, 이 순간 크라이슬러 빌딩은 319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됐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폭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대공황의 시작으로 기억되는 '검은 목요일'입니다.
그로부터 70년 뒤인 1999년, 한 투자은행 애널리스트가 이런 우연들을 모아 보고서를 냈습니다. 세계 최고층 빌딩이 올라갈 때마다 경제위기가 따라왔다는 내용입니다. 이 가설은 '마천루 지수(Skyscraper Index)'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마천루의 저주'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100년 넘는 최고층 빌딩 기록을 하나씩 꺼내 이 저주가 정말 맞는지, 맞아 보인다면 왜 그런지 숫자로 따져 보겠습니다.
1. 1929년 10월 23일, 90분 만에 솟아오른 첨탑
1929년 뉴욕에서는 세계 최고층을 두고 경쟁이 붙어 있었습니다. 맨해튼 금융가의 40 월스트리트 빌딩은 크라이슬러 빌딩보다 높아지려고 그해 4월 설계를 927피트(283m)로 올렸습니다. 크라이슬러 쪽 건축가는 경쟁자가 최종 높이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125피트(38m)짜리 첨탑을 건물 안에서 조립했습니다. 10월 23일 이 첨탑을 끌어올리자 크라이슬러 빌딩은 1,046피트(319m)가 됐습니다. 40 월스트리트는 완공되기도 전에 2위로 밀려났습니다.
그런데 1930년 5월 완공된 크라이슬러 빌딩의 1위는 11개월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1931년 5월 1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높이 381m, 102층. 1930년 3월 17일 공사를 시작해 410일 만에 완공했고, 공사비는 약 4,100만 달러로 예산 5,000만 달러보다 적게 들었습니다. 공사만 보면 대성공이었습니다.
문제는 개장 시점이었습니다. 대공황 한복판에 문을 연 이 빌딩은 사무실을 빌리겠다는 회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1932년 미국 신문들은 이 빌딩을 '엠프티(텅 빈) 스테이트 빌딩'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유주가 처음으로 이익을 낸 것은 1950년대 초, 개장한 지 약 20년 만이었습니다.
2. 최고층 기록이 바뀔 때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저주 가설을 처음 정리한 보고서가 든 사례를 중심으로, 세계 최고층 기록을 새로 쓴 빌딩들과 그 무렵의 경제를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 빌딩(도시) | 완공 | 높이 | 그 무렵 경제 |
|---|---|---|---|
| 싱어 빌딩(뉴욕) | 1908년 | 187m | 1907년 금융공황 |
| 메트라이프 타워(뉴욕) | 1909년 | 213m | 1907년 금융공황 |
| 크라이슬러 빌딩(뉴욕) | 1930년 | 319m | 1929년 대공황 시작 |
|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뉴욕) | 1931년 | 381m | 대공황 |
|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뉴욕) | 1972년 | 417m | 1973년 오일쇼크, 1973~74년 증시 폭락 |
| 시어스 타워(시카고) | 1973년 | 442m | 같은 시기 |
|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쿠알라룸푸르) | 1998년 | 452m |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
| 타이베이 101(타이베이) | 2004년 | 508m | 뚜렷한 경제위기 없음 |
| 부르즈 할리파(두바이) | 2010년 | 828m | 2009년 두바이 채무 위기 |
| 제다 타워(사우디 제다) | 2028년 목표 | 1,008m 이상 | ? |
출처: Andrew Lawrence, "The Skyscraper Index: Faulty Towers"(1999)에서 든 사례, Barr·Mizrach·Mundra(2015) 기록 경신 빌딩 목록, 각 빌딩 공식 자료. 높이는 안테나를 뺀 건축물 높이이며 피트 단위 공식 높이를 미터로 환산했습니다. 시어스 타워는 1973년 입주를 시작해 1974년 완공됐습니다.
이렇게 늘어놓으면 소름이 돋을 만큼 잘 맞아 보입니다. 1907년 공황, 대공황, 오일쇼크, 아시아 외환위기, 두바이 사태까지 굵직한 위기 옆에 늘 '세계 최고층'이 서 있습니다. 특히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줄은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 빌딩이 완공된 1998년 무렵은 한국이 1997년 말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외환위기를 겪던 바로 그 시기입니다.
3. 가장 극적인 장면: 개장하는 날 이름을 바꾼 빌딩
저주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장면은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입니다. 2004년 공사를 시작했고 공사비는 약 15억 달러, 높이는 828m로 직전 기록인 타이베이 101(508m)보다 무려 320m, 63%가 높았습니다. 원래 이름은 '부르즈 두바이(두바이의 탑)'였습니다.
그런데 완공을 앞둔 2009년 11월, 두바이 정부가 소유한 투자회사 두바이월드가 약 260억 달러 규모의 빚을 제때 갚기 어렵다며 상환 유예를 요청했습니다. 세계 금융시장이 흔들렸고, 이웃 토후국 아부다비가 12월에 100억 달러를 긴급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1월 4일 개장식에서 빌딩 이름이 깜짝 발표됩니다. '부르즈 두바이'가 아니라, 돈을 빌려준 아부다비 통치자 셰이크 칼리파의 이름을 딴 '부르즈 할리파'였습니다. 한때 제곱피트당 1,900달러가 넘던 이 빌딩의 아파트 가격은 개장 무렵 절반 아래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4. 같은 기록을 빠짐없이 세어 보면: 14번 중 7번
여기서 경제학자들이 등장합니다. 미국 럿거스대 경제학자 제이슨 바, 브루스 미즈락, 쿠숨 문드라는 2015년 이 저주를 정식으로 검증한 논문을 냈습니다. 미국(1885~2009년), 캐나다, 중국, 홍콩에서 해마다 지어진 가장 높은 건물과 1인당 소득을 비교했고, 세계 최고층 기록을 깬 빌딩 14개의 발표 시점과 완공 시점을 미국 경기 순환 날짜와 하나씩 맞춰 봤습니다.
| 검증 항목 | 결과 |
|---|---|
| 최고층 기록 빌딩 14개 중 호황기에 발표된 것 | 10개 |
| 14개 중 불황기에 문을 연 것 | 7개(딱 절반) |
| 그중 2차 대전 이후 기록 빌딩 5개 | 0개 |
| 소득(GDP)이 건물 높이를 설명하는가 | 그렇다(4개 지역 모두) |
| 건물 높이가 앞으로의 소득을 예측하는가 | 아니다 |
출처: Barr, Mizrach & Mundra, "Skyscraper Height and the Business Cycle: Separating Myth from Reality", Applied Economics(2015). 홍콩만 '높이가 소득을 예측한다'는 결과가 p값 0.07로 10% 기준에서만 유의했고, 통상 기준(5%)으로는 네 지역 모두 예측력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불황 기간 비율은 미국 경제연구소(NBER) 경기순환 기준일의 평균 수축·확장 기간으로 계산했습니다.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경제가 커지면 건물이 높아지는 것이지, 건물 높이가 경제위기를 예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14번 중 7번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절반이니 꽤 높아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릅니다. 불황기에 문을 연 7개는 모두 1931년 이전 뉴욕 빌딩입니다. 그 시절 미국은 경기가 자주 꺾여서, 1854~1919년만 봐도 전체 기간의 약 45%가 불황이었습니다. 아무 때나 문을 열어도 절반 가까이는 불황과 겹쳤을 시기입니다. 반대로 2차 대전 이후 기록을 깬 5개(세계무역센터, 시어스 타워, 페트로나스, 타이베이 101, 부르즈 할리파)는 모두 미국 경기가 확장하던 때 문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저주 가설의 약점이 드러납니다. 앞의 표에서 '적중'으로 꼽힌 페트로나스와 부르즈 할리파는 미국 경기를 기준으로 하면 '빗나간' 사례입니다. 두 빌딩이 만난 위기는 미국이 아니라 아시아와 두바이의 위기였습니다. 어느 나라 경기를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적중이 되기도 하고 빗나감이 되기도 한다면, 그 가설은 무엇이든 맞힐 수 있는 셈입니다.
반대 방향의 반례도 많습니다. 1937년 미국 경기 침체나 1980년대 초 불황 때는 세계 기록을 깬 빌딩이 없었습니다. 2004년 타이베이 101도 뚜렷한 위기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저주가 잘 맞아 보였던 것은, 맞은 사례만 기억에 남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 빌딩 | 개장 | 높이 | 당시 기록 | 그 뒤 경제 |
|---|---|---|---|---|
| 63빌딩(서울 여의도) | 1985년 | 249m | 북미 밖 최고층 | 3저 호황, 두 자릿수 성장 |
| 롯데월드타워(서울 잠실) | 2017년 | 555m | 세계 5위 | 증시 조정, 경기 침체는 없음 |
출처: 경향신문(2015.2.13), 서울신문(2017.4.3), 코리아중앙데일리(2018년 코스피 결산). 롯데월드타워는 2017년 4월 3일 개장했고, 코스피는 2018년 1월 29일 2,598.19로 사상 최고치를 찍은 뒤 그해 말 2,041.04로 마감했습니다.
63빌딩은 정반대였습니다. 완공 이듬해부터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3저 호황'이 찾아왔습니다. 롯데월드타워 때는 미래학자 존 캐스티가 2010년 책 《대중의 직관》에서 내놓은 예측이 다시 화제가 됐습니다. 롯데월드타워가 완공되면 한국에도 불황이 찾아올 수 있고, 한국 주식시장이 곧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과는 반만 맞았습니다. 개장 약 10개월 뒤인 2018년 1월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를 찍었고, 그해 말에는 그 고점보다 21.4% 낮은 수준에서 마감했습니다(연간 하락률 17.3%). 하지만 경제위기라고 부를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5. 그래도 저주처럼 보이는 이유: 짓는 사이 바뀌는 경기
통계로는 예측력이 없는데 왜 이 이야기는 100년 가까이 살아남았을까요. 저는 '시간'에서 한 가지 답을 찾습니다. 논문의 결론이 아니라 템휴의 해석입니다. 세계 최고층 빌딩은 계획을 발표하고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은 점점 길어졌습니다.
| 빌딩 | 계획 발표 | 개장 | 걸린 시간 |
|---|---|---|---|
| 크라이슬러 빌딩 | 1928년 | 1930년 | 2년 |
|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 1929년 | 1931년 | 2년 |
| 시어스 타워 | 1970년 | 1973년 | 3년 |
|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 1991년 | 1999년 | 8년 |
| 타이베이 101 | 1997년 | 2004년 | 7년 |
| 부르즈 할리파 | 2003년 | 2010년 | 7년 |
출처: Barr·Mizrach·Mundra(2015) 표의 발표·개장 연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는 1998년 완공, 1999년 공식 개장입니다.
1930년 전후 뉴욕에서는 2~3년이면 됐지만, 최근 세 빌딩은 계획부터 개장까지 7~8년이 걸렸습니다. 경기가 한 바퀴 돌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는 말레이시아가 고성장을 이어 가던 1991년에 계획돼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지나 문을 열었고, 부르즈 할리파는 두바이 부동산이 달아오르던 2003년에 계획돼 2009년 두바이 채무 위기 직후 문을 열었습니다. 호황의 한복판에서 계획한 빌딩이 문을 열 때쯤이면 그 호황이 끝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딩이 위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빌딩을 짓는 시간이 호황보다 길 뿐입니다.
물론 이 설명도 모든 사례를 맞히지는 못합니다. 크라이슬러와 엠파이어스테이트는 2년 만에 지었는데도 대공황을 만났고, 7년이 걸린 타이베이 101은 큰 위기 없이 문을 열었습니다.
저주를 믿는 쪽의 설명도 들어 볼 만합니다. 미국 경제학자 마크 손턴은 금리가 낮아지고 돈이 쉽게 풀릴 때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봤습니다. 땅값이 올라 같은 땅에 더 높이 지을수록 이득이 되고, 덩치가 커진 기업들이 더 큰 사무실을 원하고, 싼 자금이 새로운 건축 기술에 몰린다는 것입니다. 셋 다 호황의 끝자락에 정점을 찍습니다. 건축사학자 캐럴 윌리스의 표현이 가장 정확해 보입니다. 높이는 위기의 예언자가 아니라 "호황의 기압계"라는 것입니다.
그 기압계를 실제로 읽으려 한 사례도 있습니다. 저주 가설을 처음 낸 애널리스트는 2012년 1월 새 보고서에서, 당시 전 세계에서 짓고 있던 초고층 빌딩 124개 중 53%가 중국에 있다며 5년 안에 중국과 인도에 조정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3년여 뒤인 2015년 6월 12일 상하이종합지수는 장중 5,178까지 올랐다가 8월 25일 2,965(종가)로 주저앉았습니다. 두 달 반 만에 약 43%가 빠진 것입니다. 같은 2015년 상하이에서는 632m의 상하이 타워가 완공됐습니다. 적중이라고 하기도, 우연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장면입니다.
6. 다음 시험대: 2028년, 1km 빌딩
저주를 다시 시험할 빌딩은 이미 올라가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홍해 연안의 제다 타워입니다. 2013년 4월 공사를 시작했지만 2018년 1월, 3분의 1쯤 지은 상태에서 공사가 멈췄습니다. 코로나19까지 겹쳐 7년 동안 멈춰 있다가 2025년 1월 공사가 공식 재개됐고, 올해 9월 116층(약 466m)까지 올라갔습니다. 목표 높이는 1,008m 이상으로, 부르즈 할리파보다 180m 높은 인류 최초의 1km 빌딩입니다. 지금 높이는 목표의 약 46%, 완공 목표는 2028년입니다.
이 빌딩은 저주 가설의 약점을 그대로 보여 주기도 합니다. 건설 계약을 발표한 2011년부터 완공 목표인 2028년까지 17년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길면 그 사이에 경기 침체가 한 번도 없기가 더 어렵습니다. 2028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다시 "저주가 맞았다"고 말할 것이고, 아무 일도 없으면 조용히 잊을 것입니다.
템휴 해석 | 마천루는 예언자가 아니라 영수증
세계 최고층 빌딩은 위기를 부르는 저주도, 위기를 맞히는 예언자도 아닙니다. 호황기에 싸게 풀린 돈이 남긴 영수증에 가깝고, 그 영수증이 짓는 기간만큼 늦게 도착할 뿐입니다. 그래서 빌딩 높이를 보고 투자 결정을 내릴 일은 없습니다. 다만 금리가 낮고 대출이 빠르게 늘면서 "역대 최고"라는 계획이 여기저기서 나온다면, 그때는 빌딩이 아니라 그 빌딩을 짓게 만든 돈의 흐름을 한 번 점검해 볼 만합니다.
템휴의 정리
오늘의 장면: 1929년 10월 23일 크라이슬러 빌딩 첨탑이 올라간 다음 날, 대공황을 연 '검은 목요일'이 왔습니다.
저주의 근거: 엠파이어스테이트(1931, 대공황), 시어스 타워(1973, 오일쇼크), 페트로나스(1998, 아시아 외환위기), 부르즈 할리파(2010, 두바이 채무 위기). 부르즈 할리파는 개장 날 돈을 빌려준 아부다비 통치자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검증 결과: 최고층 기록 빌딩 14개 중 불황기에 문을 연 것은 7개로 모두 1931년 이전 뉴욕 빌딩이었고, 2차 대전 이후 5개는 모두 미국 호황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소득이 높이를 설명할 뿐 높이는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Barr 외, 2015).
한국: 63빌딩 뒤에는 3저 호황이, 롯데월드타워 뒤에는 증시 조정이 왔지만 경제위기는 없었습니다.
저주처럼 보이는 이유: 최근 최고층 빌딩은 계획부터 개장까지 7~8년이 걸립니다. 호황 때 계획한 빌딩이 문을 열 무렵엔 호황이 끝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템휴의 해석입니다. 다음 시험대는 2028년 1km를 넘을 제다 타워입니다.
사람들이 마천루의 저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그 이야기에 담긴 교훈 때문일 겁니다. 하늘 끝까지 닿겠다는 자신감이 가장 클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통계로는 틀린 가설이지만, 그 교훈만큼은 100년이 지나도 쓸모가 있습니다.
이상, 템휴 였습니다.







